지난 2년간 안방극장을 강타했던 ‘고구려 사극’ 돌풍이 이제 막을 내렸다. 지난 5일, 24부로 종영한 MBC <태왕사신기>에 이어 23일에는 <대조영>이 134회를 끝으로 1년 3개월간의 대장정을 마감하며, 고구려 연대기 4부작의 대미를 장식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파문 등으로 인하여 우리 고대사에 대한 민족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고구려사 복원 열풍은, 대중들에게 ‘잊혀진 과거’에 대한 역사인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광대한 영토와 자주적인 역사로 기억되는 고구려 시대는 그 중심에 있었고, 고구려의 건국에서 융성기와 쇠퇴기를 거쳐 발해 부흥기로 이어지는 장대한 역사는 브라운관을 통해 안방극장에 화려하게 부활하며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로 인하여 드라마의 장르와 소재범위가 넓어지며 시대극이 ‘안방극장의 블록버스터’로 자리매김하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내 방송가의 열악한 제작환경과 촉박한 촬영일정으로 인한 구조적 한계, 극적 구성의 편의에 따른 작위적인 설정의 남발과 역사왜곡 논란, 시청률을 볼모로 한 편성파행과 연장방송 논란으로 인한 극적 완성도 저하 등은 한국의 대형 사극들이 극복하지 못한 숙제이기도 했다.

◇ MBC 사극 <주몽>

주몽-고구려의 건국시조, 영광의 시작

고구려 사극 열풍의 첫 주자라 할 수 있었던 <주몽>은 지난 2006년 5월 15일 첫 방송된 이래 지난 3월 6일, 81회를 끝으로 대장정을 마감하기까지 평균시청률 40.6%, 34주 연속 전체 시청률 1위라는 한국 방송가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조연의 이미지가 강하던 송일국은 이 작품으로 명실상부한 당대 일급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시조 주몽의 일대기를 최초로 담아낸 <주몽>은 기존 사극과 차별화되는 감각적인 영상,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젊은 층에서 중장년층에 이르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한 당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역사왜곡에 대항하는 드라마라는 상징성도 국민적인 지지를 얻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몽>은 주인공 주몽 개인의 영웅적 활약상을 부각시키는데 치우치며 고구려 건국과 고조선 부흥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성찰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작가와 배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연장방송 결정으로 후반부 극적 완성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고, 왜색이 묻어나는 갑옷과 복식의 디자인이나 폭약의 등장, 주몽과 대소가 연합하여 한나라를 상대로 싸운다는 전개 등 전개상 편의를 위한 잘못된 사실 묘사의 남발은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역사왜곡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주몽>은 정통사극과 판타지 사이에서 어정쩡한 줄타기를 하다가 방향을 잃은 불완전한 작품이기도 했다.

◇ SBS 사극 <연개소문>

연개소문-독재자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SBS <연개소문>은 2006년 7월 8일 첫 방영되어 2007년 6월 17일 100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태조왕건>, <용의 눈물>로 유명한 이환경 작가가 각본을 맡고 ‘사극지왕’ 유동근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연개소문>은 역사상 임금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한 연개소문을 외세의 침입을 막아낸 국민영웅으로 재조명해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4부작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남성적인 색채가 강했던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구려 말, 동아시아의 사회적 격변기를 무대로 대당(對唐) 외교정책의 이견 때문에 대립하게 되는 자주파(연개소문)와 실리파(영류왕)의 갈등은 드라마에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궁극적으로 과도한 민족주의 정서가 지니는 이념적 한계로 용두사미로 마감해야했다. 극 초반 이태곤이 연기한 ‘청년 연개소문’의 캐릭터는 자리 잡지 못했고, 시트콤 ‘수나라네 사람들’이라는 조롱을 당한데 이어, 의미 없는 전쟁씬의 남발, 단조롭고 설명적인 극적 구성은 물론, 백제의 멸망이나 삼국의 역학관계에 대한 편향적이고 후진적인 역사인식, 마지막 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불사조’(?) 연개소문 등으로 빈축을 사야했다.

여기에 갈수록 빡빡한 제작일정과 제작비 부족에 시달린 연개소문은. 극 배경에 사진을 입힌 합판을 사용하는가하면, 백제의 삼천궁녀 투신 장면을 엉성한 CG로 때우며 시청자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방영 중반에는 스태프들의 임금체불논란으로 또 한 번 소란을 빚기도 했다. 고구려 4부작 중 유일하게 히트작으로 꼽히지 못하고 조용하게 종영해야했던 <연개소문>은 좋은 제작 의도나 무조건적인 물량 투입도 드라마의 극적 완성도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뼈아픈 사례였다.

◇ MBC 사극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한국 최초의 본격 판타지 사극

한류스타 배용준의 출연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태왕사신기>는 기존의 정통사극들과는 차별화되게 국내 최초의 본격 판타지 사극을 표방하여 화제를 모았다. 100회 이상을 돌파했던 다른 고구려 사극과는 달리, 24부작의 짧은 호흡에도 편당 제작비가 웬만한 미니시리즈 전체 제작비에 육박할 정도로, 430억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며 현란한 스펙터클과 전투씬, CG 장면 등에서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했고 이지아라는 신인의 재발굴이 이뤄졌다.

<태왕사신기>는 기존 사극의 전형성과 역사 고증의 집착에서 처음부터 벗어나있었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으로 대표되는 네 개의 신물을 모으면 ‘쥬신의 왕’이 된다는 판타지적인 요소와 화려한 영상미는, 사극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을 대거 TV 앞으로 불러 모으는데 성공했고, 만화적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과 현대적인 대사 표현으로 시선을 모았다. 배용준이 연기한 담덕은 기존 배우들의 근엄하고 호탕한 남성적 제왕의 이미지를 바꾸며 부드럽고 지혜로운 제왕의 캐릭터를 창조했다.

그러나 각 인물들을 둘러싼 복잡한 갈등구조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들에게 이야기가 불분명하고 난해해지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의 성장과정이나 정복군주로서의 찬란한 업적은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사실상 사신의 보물찾기 내지는 고구려 내부에서의 내전에서 맴돌다 막을 내렸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캐릭터 자체를 배용준의 이미지와 스타성에 맞추다보니 광개토대왕을 마치 정복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멜로 왕자’처럼 왜곡시켜버린 것도 스타 캐스팅의 부작용이었다.

또한 <태왕사신기>는 방송이전부터 제작과정의 문제로 방송사에 두 차례나 파행편성을 초래하며 여론과 MBC 노동조합의 거센 비난을 받는가하면, 후반부에는 방송시간을 맞추지 못해 뉴스데스크를 20분 연장하는 웃지 못 할 사태를 만들기도 했다. 상품성 있는 대작에 대한 욕심도 좋지만, 시청자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망각한 드라마라는 것은 원죄가 될 수밖에 없다.

◇ KBS 사극 <대조영>

대조영-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잊혀진 역사’ 발해를 브라운관에서 되살렸던 <대조영>은 지난 23일 134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온갖 역경을 딛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우리 민족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했고, 대선이라는 시대적 분위기가 맞물려 대중이 갈망하는 선구적 리더십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사극의 보증수표로 자리 잡은 최수종의 뛰어난 호연과 임동진, 김진태, 임혁, 이덕화, 정태우, 김학철 등 신-구 배우들의 눈부신 호연은 주인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다른 고구려사 드라마들에 비해 한결 탄탄한 극적 완성도와 풍부한 캐릭터의 매력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태조왕건>,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등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구축한 KBS 사극만의 전쟁씬 제작 노하우가 결합되며,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일대를 아우르는 장대한 극중 스케일도 단조로워지기 쉬운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대조영> 역시 당초 100회로 예정되어있던 기획이 시청률에 따라 무리한 연장방송을 거듭하며 극의 완성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많은 기대를 모았던 천문령 전투의 승리 과정이 너무 엉성하게 묘사된 것이나, 역사적으로 이미 사망했어야할 설인귀나 걸사비우같은 인물들이 실제 생몰연도 이후에도 살아있는 등 갈팡질팡하는 극적 구성이나 촉박한 제작일정의 한계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과도한 영웅주의 사관에 치우쳐 대조영을 완전무결한 초인처럼 묘사한 것이나, 전투-음모-위기-다시 전투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사이클의 반복은 발해 건국이라는 초심을 잃어버린 채 비슷한 모험담의 무한 재탕으로 이어지며 시청자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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