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 vs <천추태후>│ 새로운 고려, 할 수 있겠느냐?

 

2009.04.01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윤이나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고려판 알파걸이라는 천추태후의 재조명과 박력 넘치는 전투 신을 전면에 내세우며 시작된 KBS 대하사극 <천추태후>.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여전히 <천추태후>는 종전의 사극들에 비해 내세울 만한 차별점이 있을까? 오히려 <천추태후>는 시간이 흐를수록 KBS 사극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쟁과 권력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백성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북진정책과 영토회복을 고수하는 숭덕궁주(채시라)의 모습은 이전의 < 태조 왕건>이나 <대조영>에서 보아왔던 이상적인 지도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숭덕궁과 황주를 둘러싼 편 가르기와 줄 서기로 대표되는 권력 다툼과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비극도 익숙하다. E.H.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다. 어쩌면 사극은 과거에게 있어 조례시간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교감 선생님 같은 존재는 아닐까? <10 아시아> 강명석 기자와 윤이나 TV평론가가 그 물음에 답했다. /편집자주 

 

 

KBS <천추태후>는 어린 황보수(채시라)가 패망한 발해의 유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황보수가 고려를 고구려와 발해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로 만들 것이라는 예언인 동시에, 이 작품이 발해의 기원을 다룬 KBS <대조영>을 잇는 대하사극이라는 KBS의 선언처럼 보인다. 나라의 적이 당에서 거란으로 바뀌었을 뿐, 권모술수에만 능한 화친파가 목숨을 걸고 거란과 싸우는 충신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황보수는 대조영처럼 백성을 구할 ‘운명의 주인공’이고, 여진족의 영광을 위해 사는 안티 히어로 김치양(김석훈)은 <대조영>의 이해고(정보석)와 닮았다. 황보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이 동일한 패턴에 변주를 주는 중요한 장치다. 황보수와 그의 오빠 성종(김명수)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성종이 그의 아들 왕송(박지빈)을 빼앗아서고, 황보수의 동생이자 경종(최철호)의 왕후였던 황보설(신애)과 경주원군(김호진)의 혼인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된다.

‘구국의 아이콘’ 앞에서 단순 처리된 정쟁의 구도

    
        
            
        
    

<천추태후>는 여성의 개인사를 고려의 정치적 상황과 결합해 선악과 피아가 불분명한 인간관계의 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치양은 황보수의 보이지 않는 위협인 동시에 황보수의 연인이 될 것이고, 성종은 정적이면서 자신을 위해 팔려가듯 경종과 혼인까지 했던 동생에 대한 애증으로 고뇌한다. 그러나 <천추태후>에서 캐릭터의 다면적인 관계는 그들의 개인사에 머물 뿐, 정치적 관계로 확장되지 못한다. 황보수와 서희(임혁)같은 황주와 북방근기계 인사들은 정의롭고 유능한 반면, 그들과 대립하는 성종과 신라계 관료들은 유약하고 무능하다. 신라계 관료들은 권력 때문에 왕송을 암살하려 하고,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항복을 주장한다.

<천추태후> 초반에 거란과 싸울 것을 주장하는 황보수와 땅을 주더라도 백성을 살리겠다는 성종의 대립은 정치적 견해 차이였다. 하지만 <천추태후>가 성종과 신라계가 얼마나 ‘다른’ 길을 가는지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최근 다시 불거지는 두 사람의 대립은 성종의 견해가 무지와 유약함의 소산이었음을 확인시킨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황보수의 존재 의의도 달라진다. 황보수가 오빠 때문에 경종과 억지로 혼인했을 때, 황보수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여성에 대한 시대적 한계가 결합해 탄생시킨 희생자이자, 한 시대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천추태후>가 이분법적인 선악구도로 흘러갈수록 황보수는 절대선과 같은 존재가 되고, 그 사이 정치가이자 여자이며, 어머니인 황보수의 캐릭터는 나라의 위기 속에 오직 구국을 위한 전쟁의 정당성만을 설파하는 ‘구국의 아이콘’으로 변한다. 여기에 고려가 현대 못지않게 남녀평등이 실현된 사회였다는 <천추태후>의 부연 설명은 황보수의 주장을 더욱 정당화 시킨다. 고구려의 이념을 이어받은 고려는 황보수같은 여걸을 탄생시킨 반면, 남녀평등을 반대하는 유학을 신봉하는 성종은 유약하고 무능하다.

왜 사극은 고구려를 절대적인 이념처럼 받아들이게 됐는가

<천추태후>는 영웅사극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변화시키면서 기존 영웅사극의 캐릭터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으되, 결과적으로 고구려-대제국-전쟁이라는 삼위일체에 가까운 영웅사극 특유의 세계관을 더욱 정당화 시켰다. 이는 가깝게는 격렬한 전투를 보여줄수록 시청률이 올라가고, 이를 위한 전쟁 영웅이 필요한 <천추태후>의 대중적인 위치와 관계가 있겠지만, 멀게는 <태조왕건>으로부터 <천추태후>에 이르는 KBS의 고려사극의 변화에 따른 결과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던 비정한 정치극의 풍모를 갖고 있던 <태조왕건>과 <제국의 아침>과 달리, 직접적으로 ‘대제국’ 고구려와의 관계를 강조한 <대조영>은 정치를 마치 선악 구도처럼 해석했으며, <천추태후>는 여성을 통해 그것을 더욱 강화한다. 그 사이 고구려의 정신과 무력과 영웅에 대한 열광은 커지고, <천추태후>의 성종으로 대표되는 신라계와 유학, 더 나아가 그 사상을 이어받은 조선의 자취는 희미해진다. 왜 <천추태후>는 결국 <대조영>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고, 왜 TV의 대하사극은 고구려와 영웅, 그리고 전쟁을 거의 절대적인 이념처럼 받아들이게 됐는가. 어쩌면 <천추태후>는 이 질문에 대해 ‘여성’이라는 나름의 해답을 던졌으되, 결국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강명석

사극은 이미 결정되어진 운명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고민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장르다. 특히 고증을 중시하는 정통 사극의 경우는, 정해진 이야기의 틀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통해서 결정되어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KBS <천추태후>는 이루어야 할 뚜렷한 목적을 태생적으로 타고나지 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다른 사극들과 그 출발점이 다르다. <천추태후>는 이를 위해 주인공에게 당시 시대상에 반하는 ‘운명’을 내려주고, 평생을 두고 그 목적을 향해 싸우도록 요구한다. 그 목적은 바로 ‘대제국 고려’다.

<태조 왕건>의 고려와 <천추태후>의 고려가 다른가?

    
        
            
        
    

“나는 고려의 짐이 될 수 없다.” 거란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하자, 숭덕궁주 황보수(채시라)는 자진해서 물속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은 <천추태후>라는 드라마와 훗날 천추태후가 되는 주인공 황보수의 목적을 보여준다. 웅장한 전투 장면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1회와 2회 초반까지의 거란전이 이렇게 마무리 되면서, 이야기는 황보수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공교롭게도 어린 시절의 첫 장면은 어린 황보수(김소은)가 말에게 이끌려간 언덕에서 태조 왕건의 환상을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북방을 향해 멈추지 말고 가야만 한다’는 태조 왕건의 명령, ‘황제 고려를 회복하라’는 할머니인 신정황태후(반효정)의 유언에 따라 황보수의 운명은 결정된다.

문제는 이 지상 명령으로 인하여, 어른이 된 황보수가 그 목적 하나로 인해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게 된 아들(박지빈)을 향한 서신 속에도 ‘북방정벌’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황보수에게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다가 죽은 황보설(신애)만큼의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황보수는 황제의 자리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다 결국 광기를 내뿜는 경종(최철호)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품이 넓은 여인이었으나, 어른이 된 황보수는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는 일말의 타협도 하지 않고 가차 없이 칼을 빼 든다.

그녀의 서슬 퍼런 대제국 고려의 꿈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거란족뿐만이 아니다. <천추태후>의 가장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인 숭덕궁(황보수의 본거지) 내부의 적들이 지금까지 부각될 수 없었던 것 역시 이러한 황보수의 모습에 가려져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내부의 적 김치양(김석훈)과, 고려인이 아닌 발해 유민으로서의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강조(최재성) 역시 황보수의 목적을 위한 싸움 속에서 이렇다 할 부딪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 본연의 갈등이나 감정은 휘발되고 오직 성종(김명수)으로 대변되는 신라계와 황보수 중심의 북방계 사이의 갈등, 그리고 무슨 일에든 ‘고려를 위해서’라는 당위를 앞세우는 여걸 황보수 만이 남았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환상에서도 불러오는 <태조 왕건>의 고려와, <천추태후>의 고려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진짜 ‘천추태후’가 되기 위하여

그래서 1회와 2회의 초반 묘사되었던 바로 그 거란과의 전투로 돌아온 지금이 <천추태후>에는 더욱 중요하다. 극한의 위험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황보수의 강하고 영웅적인 면모 바깥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란과의 전투는 외교 담판과 귀주대첩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복원하면서 지금까지 뚜렷한 인상을 주지 못했던 서희(임혁)와 강감찬(이덕화)의 캐릭터를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황보수는 거란과의 전투 도중, 어릴 적 태조 왕건의 환상을 보았던 그 언덕을 다시 발견한다. 어린 황보수가 보았던 환상 속에서 태조 왕건이 운명을 예언하며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황보수는 울며 고개를 흔든다. 지금의 황보수에게는 그 때의 망설임과 고민이 필요하다. 80부작이라는 긴 사극은 한 인간의 영웅적인 면모를 묘사하고 과시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황보수가 진짜 ‘천추태후’가 되기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글 윤이나



http://10.asiae.co.kr/Articles/view.php?tsc=004005000&a_id=2009040110230284687